박노해씨가 사진전을 연다는 소식을 듣었다. 처음엔 '동명이인'인줄 알았다.
박노해는 한국의 민주주의와 연결되는 사람이었다. 대학 시절 술에 취해 자주듣던
'사람만이 희망이다'라는 책으로 대표되던 그는 기억에서 사라진 지 오래였다.
민주주의는 이제 어느 정도 성숙해 졌고, 집의 책꽂이에는 '노동의 새벽'만이 꽂혀 있다.
그 뒤로 박노해는 어떻게 됐을까? 인터넷을 검색하고 나서야 그가 내가 아는 박노해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런 그가 이라크, 레바논, 팔레스타인 등을 다니면서 사진을 찍었단다.
나는 을지로 3가 쪽에 갈 일을 만들고 기어코 사진전을 찾았다. 전시장을 들어서자마자
중동식 홍차인 '샤이'차를 건네준다. 달콤하고 따뜻하다.
박노해가 담아낸 흑백 사진의 렌즈 속에는 무표정하고, 깊은 슬픔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흑백 사진 너머로는 건조한 중동 땅의 먼지가 풀풀 나에게까지 날렸다.
골동품을 팔지만 동정만은 사양한다는 소녀의 눈망울 속에서, 105살된 어머니의 간절한
소망을 바라는 모습 속에서, 언제 헤어질 지 몰라 평소 자주 손을 잡는다는 형제의 모습
속에서 중동의 삶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고향에서 쫓겨난 팔레스타인의 여인의 모습에
가슴이 저렸고, 폭격더미에서 살아난 13살의 사나 샬흡의 사진에서는 깊은 절망을 봤다.

#20 폭격더미에서 살아나온 사나 샬흡 (13세) Qana, Lebanon, 2006.
레바논 남부 까나 마을 집단학살 현장. 건물 지하실로 대피한 마을 사람들 중 65명이 사망했고 그 중 35명이 아이들이었다. ‘A Plane VS A Child’ (전폭기 대 아이들). 까나 마을 어린이 대학살이 세계에 알려지면서 이스라엘과 미국은 인류의 눈 앞에서 무릎을 꿇어야 했다. 폭격더미에서 살아 나온 사나 샬흡 Sana Salhub (13세)은 하루아침에 부모와 언니와 오빠와 집을 잃고 혼자서 어린 동생을 책임져야 하는 소녀 가장이 되었다.

#27 전사한 형의 사진 앞에서 Nablus, Palestine, 2005.
‘한 집 건너 학살 가정, 한 집 건너 전사 가정’ 나블루스 발라타 난민촌은 집집마다 팔레스타인의 자유를 위해 싸우다 희생된 가족 사진이 걸려있다. 난민촌 형제들은 어디서나 서로 손을 꼭 잡는다. 언제 서로 떨어질지, 언제 영영 사라질지, 한 번이라도 더 품에 안고 한 번이라도 더 손을 잡는다.
가장 기억에 남는 사진은 '유서깊은 바그다드 카페'였다. "거리에는 검은 연기와 시체 냄새가 풍겼지만 전쟁 이후 처음으로 문을 연 바그다드 카페에서 사람들은 침묵하면서 샤이(중동식 홍차)를 마셨다"라는 식의 설명이 붙어있는 사진이었다. 내가 맛봤던 달콤한 홍차는 깊은 슬픔과 절망 속에서 침묵하면서 마셔야 했던 차였단 말이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마을과 카페 안의 정적에 나도 침묵했다. (아쉽게도 그 사진은 홈페이지에 없다.)
'수장될 위기에 처한 8000년된 하산케이프'란 사진도 기억에 남는다. 댐 건설로 8000년 된 역사는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 수자원이라는 이름으로 가두어진 물은 썩어서 또다시 우리에게 부메랑으로 돌아온다는 것을 모른 채, 세계의 지도자들은 물을 가두고 있는 것이었다. 우리나라의 4대강 사업과 영상이 엇갈리면서 씁쓸한 마음을 거둘 수 없었다. 물은 흘러야 한다.

#13 수장될 위기에 처한 8천 년 된 하산케이프 Hasankeyf , Kurdistan, Turkey, 2006.
인류 문명의 자궁인 티그리스 강의 상류 하산케이프 다리. 아나톨리아 고원과 메소포타미아 사이에서 문화 교량의 역할을 해왔으며 고대 수메르 문명과 로마, 오토만 제국의 문화 유적이 가득하다. 8천 년 역사의 숨결이 살아 숨쉬는 하산케이프는 쿠르드인의 오래된 삶의 자부심의 터전이기도 하다. 그러나 인류의 문화유산이고 영감의 원천지인 하산케이프는 지금 서서히 수장되어 가고 있다. 터키 정부는 이란, 이라크, 시리아로 흐르는 생명수인 티그리스 강을 막아 중동의 수자원을 확보, 통제하기 위해 미국과 영국의 지원으로 거대한 일리수 댐을 완공해 2006년 3월부터 물을 채우고 있다"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사진은 '걷는 독서'였다. 자그로스 산맥을 걸으면서 독서하는 여인의 모습은 어쩐지 신성하고, 경건하다. 사실 독서하는 여인의 사진은 누가 찍든, 어디에서 찍든 간에 내가 가장 좋아하는 소재다.

#8 걷는 독서 Al Jazeera, Syria, 2008.
근대의 묵독 이전의 낭송 전통으로 걷는 독서. 눈 덮인 자그로스 산맥을 달려온 바람은 맑다. 그는 지금 자신의 두 발로 대지에 입 맞추며 오래된 책 속으로 걸어 들어가고 있다. 선조들의 복장과 걸음과 음정 그대로.
참으로 많은 것을 떠올리고, 생각하게 하는 전시였다. 무엇보다 팔레스타인과 이라크,
레바논 등에서 고통받고 있는 이들 속으로 들어갔던 작가의 시선과 떨림을 고스란히
전해받았다. 그 슬픔을 표현하기에 흑백사진은 정말 적절했다. 시간이 되면 한번쯤
사진을 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전시장은 을지로 3가역 중부경찰서 앞 M 갤러리다. 무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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