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노해 사진전 - 나 거기에 그들처럼
박노해 사진전 - 나 거기에 그들처럼

 
작성일 : 10-01-14 02:14
박노해 시인이 이라크로 떠나며 보냈던 편지
 글쓴이 : 라 광야 (121.♡.174.117)
조회 : 1,892  

아래 글은 2003년 미국의 이라크 침공 당시, 
박노해 시인이 이라크로 떠나며 쓴 편지 입니다.

  
3월 17일 새벽 3시.
부시 미국 대통령의 이라크 전쟁 선포를 TV로 지켜 보는 순간,
온 몸에 엄습하는 무력감, 나 개인의 무력감, 詩의 무력감,
사랑의 무력감에 그저 먹먹히 앉아 있었습니다.
그때 내 가슴의 작은 부르짖음을 들었습니다.
그래 가자. 이라크의 죽어 가는 저 죄없는 아이들 곁으로.
그러나 또 한구석에서는 융단 폭격의 두려움과 전장의 공포,
연고 하나 없는 낮선 땅에서 맞아야할지 모르는 죽음의 불안감이
나를 붙잡는 것이었습니다.
아침이 올 때까지 참으로 많은 생각이 오고 갔습니다.

세상은 ‘힘의 감동’을 믿지만 詩人은 ‘감동의 힘’을 믿는 존재입니다.
인간의 가슴을, 영혼을, 진실을, 우리들 마음 깊은 곳의 울림을 믿고
거기에 가 닿고자 몸부림하는 연약한 존재입니다.
나는 그렇게 살고 싶었고 살아낸 만큼 쓰고 싶었고
쓰고 말한 대로 행동하고 싶었습니다.

그 동안 이 부당하고 부도덕한 검은 전쟁을 막아 보자고 애써 왔습니다.
저녁 7시면 촛불을 켜고 함께 둘러앉아 ‘반전평화 마음모으기’를 해왔고,
동의하기 힘든 구호가 나오기도 하는 반전집회에 우리 나눔문화 연구원들과
대학생나눔문화 친구들과 함께 간절한 마음으로 참여해 왔습니다.

그러나 미국의 부시 대통령은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을 저질렀고
지상 최대의 무기를 총동원한 참혹한 전쟁은 현실이 되고 말았습니다.

10년이 넘는 미국의 경제 봉쇄 속에서 매년 10만 명이 넘는
이라크 아이들이 죽어갔습니다. 이라크 사람들은 이 모든 것이
석유 때문이라고, 이 땅에 석유가 있다는 것은 저주라고,
막대한 에너지 자원은 신의 축복이 아닌 神이 내린 저주라고 입을 모아 왔습니다.


내 아이가, 내 가족이 피를 흘리는 전쟁은 ‘현실’

전쟁은 무서운 현실입니다.
그것은 바그다드 상공을 줌업으로 조준하는 전자게임도 아니고
부시와 후세인의 선악게임도 아니며 기왕이면 빨리 끝내야 할
경제 걸림돌도 아닙니다.
전쟁은 파괴와 살육의 현장입니다.
사랑스런 당신의 애인이, 퇴근길에 달려와 품에 안기던 내 아이가
무너진 벽돌 틈에서 피를 흘리는 현실입니다.
전쟁은 모든 人間을 미치게 만듭니다.
시시각각 다가오는 죽음의 공포를 이기기 위해 병사들은
더 광기어린 폭력과 잔인성에 자신을 맡깁니다.
광기는 광기를 부르고, 그 폭력의 기운은 한 세대를 넘어서
인간성에 끈질긴 영향을 미칩니다.
힘이 곧 여론이고 무장력이 곧 정의라면, 우리 아이들에게
올바른 삶의 원칙을 가르친다는 것은 허망한 일입니다.

무엇보다 바그다드를 처참하게 파괴한 미사일과 전투기들이
곧이어 한반도를 향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 정부는 북한 핵의 평화적 해결을 약속 받는 대신
이라크전을 지지하는 부도덕한 거래를 시도하고 있습니다.
부시의 전쟁을 지지하는 아시아 3개 나라 가운데 하나,
전세계 30여 개 나라 가운데 하나가 KOREA입니다.
우리의 평화를 위해 남의 피눈물을 요구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우리 군대가 이라크전에 참전한다면 한반도 전쟁 위험이 닥쳤을 때
어떻게 국제 사회에 평화를 호소하고,
그 누가 앞장서서 「KOREA WAR Ⅱ」를 막아주겠습니까
나는 이라크전을 지지할 수 밖에 없는 못난 내 나라의 현실이 슬프고
부끄럽습니다. 나는 참회하는 마음으로 이라크인들과 고통을 함께하며
용서를 구하고 싶습니다. 한국인들의 진정한 마음은 이렇게 전쟁을 반대하고
평화를 나누는 것임을 조용히 보여주고 싶습니다.


지극히 작고 부드러운 사랑의 힘으로

이제 전쟁은 현실입니다.
우리는 부도덕한 전쟁 앞에 아무런 할 것이 없습니다.
나 개인의 무력감, 인간 정신의 무력감, 정의의 무력감에 휩싸여
우리는 TV나 바라보며 주가 영향이나 저울질하고 겉도는 삶의 이야기로
이 야만의 시간이 어서 지나가기를 바라는 수 밖에 없습니다.
이라크전이 끝나고 한반도 전쟁이 다가온다 해도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생수와 라면박스 챙겨놓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없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나는 인간을 믿습니다.
무기의 힘과 전쟁의 광기 앞에 무력할 수 밖에 없는 개인들이지만,
진정한 우리 마음의 힘을 신뢰합니다.
총과 폭탄으로도 바꿀 수 없는 우리 마음 깊은 곳의 힘,
사랑의 힘을 전쟁터에서 보여주고 싶습니다.
세상을 바꾸는 것은 첨단 무기의 힘이 아니라
지극히 작고 부드러운 사랑임을 보여주고 싶습니다.
무력한 사랑과 정의의 마음들이 함께 하면 폭력과 전쟁조차
떨게 만들 수 있음을 보여주고 싶습니다.
무기의 승리가 인간의 패배임을 입증해 보이고 싶습니다.

이 낯선 곳에서도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아무것도 없습니다.
전쟁의 공포와 고통에 울부짖는 아이들 곁에서
그것을 함께 느끼고 함께 있어 주는 것,
그것이 전쟁터로 달려 나온 제 마음입니다.


보고싶을 나의 벗들

서울에서 마음을 정리하고 책임질 일들을 대강 마친 새벽,
텅 빈 나눔문화 공간에서 한참을 서있다 우리 연구원들
빈자리 하나하나를 둘러 보았습니다.
고마운 사람들. 인간이 할 수 있는 극한까지 밀어가며 함께 밤새우고 토론하고
달리기하고 정진해 온 사람들.
그이들과 함께해 온 순간들이 바람처럼 눈앞을 지나갔습니다.

선방 문을 여니 차를 마시며 이야기하던 벗들의 미소 띤 얼굴들이
떠올랐습니다. 좁은 대학생 방을 들어가니 열정 가득한 얼굴들이
하나하나 안겨 왔습니다.
소박한 밥상을 차리는 부엌문을 여니 정성 어린 손길들이 맛 좀 보라며
제 입에 나물을 넙죽 넣어 주며 웃었습니다.
화장실을 돌아 텅 빈 나눔마당을 거닐었습니다. 함께 뒤풀이하며
서로 우정을 나누고 세상사를 논하고 술마시고 노래부르고 춤추던
다정한 얼굴들이 따뜻이 포옹해 왔습니다.
마지막으로 포럼실을 둘러 보았습니다. 저마다 자신이 선 자리에서
양심과 원칙을 지키며 열심히 살다 달려와 촘촘히 의자에 앉아 숨을 고르고,
진지한 눈빛을 빛내며 진정한 자기를 찾고 좋은 세상으로 가는 길을 함께
찾아나가던 좋은 벗들.
한 분 한 분 얼굴을 맞대며 작별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포럼실을 나서는데 그만 눈물이 흘러내려서……
미리 상의를 드리고 전화를 드리려 했지만
제 감정이 다스려 지지 않아 그마저 못하고 떠나온 걸 용서해 주십시오.

저는 아이도 없고 出家者 집안이고 직장도 홀가분한 편이라
여러 벗들의 마음을 대신해서 나섰다고 생각해 주시기 바랍니다.
(임박한 전쟁을 앞두고, 이라크, 요르단, 이스라엘, 쿠웨이트로 가는
모든 항로와 길들이 끊겨서 전장으로 가는 길조차 험로입니다.
안식년으로 이스라엘에 계시던 ‘눈물의 제왕’최창모 교수님이
요르단의 암만에서 이라크로 들어가는 길을 닦으며 기다리고 있습니다.
괜히 위험에 끌어들인 건 아닌가 서로가 미안해하며 기도하고 있습니다.


미움없는 분노, 냉소없는 비판, 폭력없는 투쟁

사랑하는 벗들.
행여 제가 미워하고 상처를 준 사람들이 있다면 이 시간 용서를 구합니다.
혹시 저에게 미움을 품고 있는 분들이 있다면 절 용서해 주시기 빕니다.
저의 잘못됨과 분노와 폭력을 돌아보며
내가 먼저 平和의 사람이 되고, 내 안에 평화의 축을 세워
평화를 나누다 쓰러지고 싶습니다.
전쟁을 반대하는 또 다른 전쟁이 아니라
어떤 폭력이 와도 평화의 마음과 행동으로 나아가고 싶습니다.
미움없이 분노하고
냉소없이 비판하고
폭력없이 투쟁하고 싶습니다.

저 광기어린 전쟁 앞에 우리는 무력할 수 밖에 없지만
무력한 사랑의 힘으로 쓰러지고 또 일어나 쓰러지며
끈질기게 전쟁을 반대하고 평화의 씨앗을 심어나가고 싶습니다.

사랑하는 벗들
유난히 겁 많고 나약한 저를 위해, 아직도 흔들리고 떨고 있는 저를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2003. 3. 19 이라크로 떠나며 
박노해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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